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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흔한 탈코르셋 이야기

허리까지 오던 머리카락을 단번에 투블럭으로 잘라버린 날이 생생하다. “정말 자르시겠어요?” 주저하는 미용사분께 네, 라고 대답할 틈도 없이 끊어지는 밧줄처럼 툭툭 떨어지던 뭉텅이들. 가벼워진 뒤통수가 어색해 연신 쓸어내리며 밖으로 나선 순간 목 뒤로 불어오던 차가운 바람. 그리고 그 무엇도, 혹은 누구도 내게 주지 못했던 짜릿한 해방감. 아마 나는 그때 처음으로 너무 행복해서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1년 전, 그렇게 나는 나를 구했다.

 

21년 만에 털어낸 머리카락들 ⓒ고함20

 

아무리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지만, 머리를 자른 후에도 얼마간은 틴트를 발랐었다. 20년 넘게 기른 머리도 포기했는데 칙칙한 입술은 이상하게도 용서가 안 됐다. 숱 많은 머리카락이 짧아지니 뜬다는 이유로 가끔 고데기에도 손을 댔다. ‘이 정도는 나한테 해줄 수 있는 거잖아.’ 그즈음 틴트를 잃어버렸다. 살까, 말까. 살까, 말까… 며칠 후, 나는 내 손으로 틴트를 다시 쥐고 말았다. 먼저 탈코르셋을 실천하고 나와 함께 미용실을 가주었던 친구의 앞에선 바르지 않았다. 부끄러웠고, 무서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비밀을 알게 된 그가 말했다. “서로에게 백래시가 되지 말자.” 분명 나를 위로하려던 말이 아니었음에도 오히려 더 큰 용기가 되어 다가왔다. 그도 나를 떠올리면서 거울 앞에서 수천 번을 고민했을 거라는 생각, 그게 그렇게 든든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나는 그날 이후로 한 번도 틴트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정말 많은 게 달라졌지만, 반대로 나는 여전히 나였다. 나는 계속 학교에 다니고, 친구들을 만나고, 아르바이트도 새로 구했다. 화장 하나 안 한다고 세상이 무너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거창한 책임감을 느끼고 살아가고 있지도 않다. 다만 내게 확실한 믿음은 내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선택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 여자 화장실에서 따가운 의심을 받는 일부터 신분증을 내밀 때마다 돌아오는 불쾌한 눈빛을 견디는 일까지, 1년 동안 내 일상은 꼭 반복되는 혐오와의 싸움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런 삶에서 자리를 지키려 한다.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누군가가 거울을 보고 자책하는 일이 줄었으면, 하고 바라니까. 이런 ‘나’도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으니까.

 

이렇게 단언할 수 있기까지도 수련이 필요했다. 나는 지금도 왜 꾸미지 않느냐는 물음을 맞닥뜨리곤 한다. 그럴 때마다 페미니즘의 선구자라도 된 것 마냥 ‘아, 저는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라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아야 할지, 아니면 ‘숱이 너무 많아서 답답하더라고요.’ 하는 식으로 설득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은 자르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이게 나에게 맞는 거 같다고. 아니, 정확히는 이 모습이 더 자연스러운 거 같다고. 지난날의 혼란들이 이 대답 하나로 점차 정리되어갔다.

 

아무튼, 그러니까, 이 글에서 하고 싶은 말은… 딱히 없다. 그냥 어떤 사람이 탈코를 했는데 이렇다더라, 정도로 누군가 들어준다면 그걸로 됐다. 조금 더 욕심을 부려서, 이 정도로 탈코르셋 이야기가 우리 사이에서 흔해졌으면 좋겠다. 내 기자 프로필 사진은 머리카락을 잘랐던 바로 그날, 친구랑 술 먹으러 가서 찍은 사진이다. 이런 ‘TMI’ 같은 말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건 프로필 사진이 아니다. 그냥 여러분께 떠들고 나니 인사하고 싶었다. ⓒ고함20

 

글. 채야채(chaeyachae@gmail.com)

특성이미지. ⓒ고함20

채야채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3 Comments
  1. 검괭

    2019년 12월 6일 23:55

    왜 머리카락을 포기해야만 할까요?
    왜 틴트를 바르면서 눈치를 봐야할까요?

    그냥 기르고, 바르세요.
    저는 탈코르셋과 그것들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

  2. 익명

    2019년 12월 8일 07:44

    선택의 과정에서 고민은 자연스러운 거라 생각합니다.
    누가 물으면 뭐라 대답하는게 제일 좋을까를 생각하는 시간을 지나고 나야 진짜 내 생각이 뭔지 감이 잡히기도 하고.
    그대가 원하는 선택을 향해 가는 고민과 망설임의 식ㆍㄴ들을 응원합니다.

  3. 익명

    2019년 12월 10일 11:59

    기사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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