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까지 오던 머리카락을 단번에 투블럭으로 잘라버린 날이 생생하다. “정말 자르시겠어요?” 주저하는 미용사분께 네, 라고 대답할 틈도 없이 끊어지는 밧줄처럼 툭툭 떨어지던 뭉텅이들. 가벼워진 뒤통수가 어색해 연신 쓸어내리며 밖으로 나선 순간 목 뒤로 불어오던 차가운 바람. 그리고 그 무엇도, 혹은 누구도 내게 주지 못했던 짜릿한 해방감. 아마 나는 그때 처음으로 너무 행복해서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1년 전, 그렇게 나는 나를 구했다.

아무리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지만, 머리를 자른 후에도 얼마간은 틴트를 발랐었다. 20년 넘게 기른 머리도 포기했는데 칙칙한 입술은 이상하게도 용서가 안 됐다. 숱 많은 머리카락이 짧아지니 뜬다는 이유로 가끔 고데기에도 손을 댔다. ‘이 정도는 나한테 해줄 수 있는 거잖아.’ 그즈음 틴트를 잃어버렸다. 살까, 말까. 살까, 말까… 며칠 후, 나는 내 손으로 틴트를 다시 쥐고 말았다. 먼저 탈코르셋을 실천하고 나와 함께 미용실을 가주었던 친구의 앞에선 바르지 않았다. 부끄러웠고, 무서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비밀을 알게 된 그가 말했다. “서로에게 백래시가 되지 말자.” 분명 나를 위로하려던 말이 아니었음에도 오히려 더 큰 용기가 되어 다가왔다. 그도 나를 떠올리면서 거울 앞에서 수천 번을 고민했을 거라는 생각, 그게 그렇게 든든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나는 그날 이후로 한 번도 틴트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정말 많은 게 달라졌지만, 반대로 나는 여전히 나였다. 나는 계속 학교에 다니고, 친구들을 만나고, 아르바이트도 새로 구했다. 화장 하나 안 한다고 세상이 무너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거창한 책임감을 느끼고 살아가고 있지도 않다. 다만 내게 확실한 믿음은 내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선택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 여자 화장실에서 따가운 의심을 받는 일부터 신분증을 내밀 때마다 돌아오는 불쾌한 눈빛을 견디는 일까지, 1년 동안 내 일상은 꼭 반복되는 혐오와의 싸움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런 삶에서 자리를 지키려 한다.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누군가가 거울을 보고 자책하는 일이 줄었으면, 하고 바라니까. 이런 ‘나’도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으니까.
이렇게 단언할 수 있기까지도 수련이 필요했다. 나는 지금도 왜 꾸미지 않느냐는 물음을 맞닥뜨리곤 한다. 그럴 때마다 페미니즘의 선구자라도 된 것 마냥 ‘아, 저는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라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아야 할지, 아니면 ‘숱이 너무 많아서 답답하더라고요.’ 하는 식으로 설득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은 자르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이게 나에게 맞는 거 같다고. 아니, 정확히는 이 모습이 더 자연스러운 거 같다고. 지난날의 혼란들이 이 대답 하나로 점차 정리되어갔다.
아무튼, 그러니까, 이 글에서 하고 싶은 말은… 딱히 없다. 그냥 어떤 사람이 탈코를 했는데 이렇다더라, 정도로 누군가 들어준다면 그걸로 됐다. 조금 더 욕심을 부려서, 이 정도로 탈코르셋 이야기가 우리 사이에서 흔해졌으면 좋겠다. 내 기자 프로필 사진은 머리카락을 잘랐던 바로 그날, 친구랑 술 먹으러 가서 찍은 사진이다. 이런 ‘TMI’ 같은 말이 되었으면 좋겠다.

글. 채야채(chaeyachae@gmail.com)
특성이미지. ⓒ고함20
검괭
2019년 12월 6일 23:55
왜 머리카락을 포기해야만 할까요?
왜 틴트를 바르면서 눈치를 봐야할까요?
그냥 기르고, 바르세요.
저는 탈코르셋과 그것들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
익명
2019년 12월 8일 07:44
선택의 과정에서 고민은 자연스러운 거라 생각합니다.
누가 물으면 뭐라 대답하는게 제일 좋을까를 생각하는 시간을 지나고 나야 진짜 내 생각이 뭔지 감이 잡히기도 하고.
그대가 원하는 선택을 향해 가는 고민과 망설임의 식ㆍㄴ들을 응원합니다.
익명
2019년 12월 10일 11:59
기사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