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7년 12월 21일, 뫄뫄고등학교 도서관에 페미니즘 책 스물한 권을 기부한 졸업생들이 겪은 기묘한 일에 관한 기록이다. 시작은 그해 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엄마가 남동생의 담임교사를 만나고 온 날이었다.

“어머님. 뫄뫄고등학교는 여자애들 기가 세서 남학생들이 내신 따기가 힘들어요.”

엄마는 황당했고 교사는 어리둥절했다. 교사가 탓한 남의 집 딸내미들 중 한 명이 바로 엄마의 딸인 나였다. ‘남학생들 기 죽이는 여자애들’로 묶였던 수 많은 딸들 중 한 명 말이다. 뫄뫄고등학교는 수행평가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이유로 학부모들이 때때로 이런 이의제기를 했다.

 

수행평가는 여학생에게 너무 유리해서 우리 아들 내신이 안 나와요.
지필평가가 더 공정하니 수행평가 비율을 낮춰야 합니다.

사실은 수행평가와 지필평가 모두 여학생들이 탁월하게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 내가 졸업할 즈음 내신 등수 30등 안에 남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와중에 이 지역에서 ‘기가 세다’고 소문난 여성 후배님들은 내게 묘한 희열을 주었다. 그들의 기가 더 더 더 강해져서 지구 정복쯤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의 실천이 ‘페미니즘 책 기부’였다. 마침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고 고등학교 친구들이 모여 있는 단톡에 계획을 알렸다. SNS에 책을 모으고 있다고 올리자 동기들 뿐만 아니라 선배들 후배들, 외국에 유학 중인 친구들도 참여해주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모두 스물 한 권의 책이 모인 것이다.

 

친구와 책 상자를 하나씩 나눠 들고 학교로 향했다. ‘학교가 페미니즘책이라고 싫어하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을 아예 안 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두 기꺼이 환영해 주셨고 행복해하셨다. 걱정은 괜한 기우였고 이 곳은 페미니즘 책을 기부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라는 믿음을 얻었다. 졸업한 페미니스트 친구들과 비롯한 익명의 페미니스트 분들이 보내주신 응원 메세지를 도서관에 비치해 두었다.

여기까지는 아름다운 2017년 크리스마스의 임파워링 모먼트라 할 수 있겠다. 사건은 겨울방학이 지나, 새학기가 시작되는 3월에 터졌다. 한 SNS 페이지에 우리가 페미니즘책을 도서관에 기부한 사진이 올라왔다.

 

뫄뫄고 근황.jpg
머리 반으로 쪼개고 싶다

… 그리고 책 기부에 함께해준 친구들의 반응은 거의 이랬다.

지가 에미넴이야 뭐야? 내 머리를 어떻게 쪼개겠다는 건데? 이렇게?

 

머리를 쪼개버리겠다는 악플을 본 한 친구는 이 짤을 보내며 비웃었다.

 

되려 그 악플들은 우리가 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 받는 꼴이었다. 이런 거엔 끄떡없지 하며 서로를 북돋아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악플 백 몇 개를 비웃어 넘기지 않고 하나 하나 확인했다. 신상이 털렸을까 봐, 정말로 우릴 알아내서 머리를 쪼개버릴까 봐.

 

고작 책을 기부했을 뿐이다. 책은 누구도 해칠 수 없다. 강간하거나 때리거나 죽일 수도 없다. 여성도 사람이라고 말할 뿐이다. 미국의 방송인 터커 칼튼은 힐러리 클린턴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다. “남자들은 힐러리를 보면 거세 불안으로 다리를 오므리게 된다.” 그러나, 알다시피, 힐러리 때문에 거세되었다는 남자는 없다. 반면에 무시할 수 없는 사실 하나가 있다. 여성의 인권을 남성들에 대한 위협이라고 느끼는 남자들은 곧 ‘위협’이 된다. 그들은 영원히 거세될 리 없는 고추가 걱정되어 여성들의 손을 잘라버리고자 한다.

 

갖은 협박에도 3년째 크리스마스 책기부는 이어지고 있다. 각 기수의 졸업생들과 오래전 연락이 끊겼던 친구들이 소식을 듣고 기꺼이 찾아와주었고, 우리가 처음으로 기부한 책들을 읽고 졸업한 후배들이 이제는 기부자가 되어 책을 고르고 있다. 출판사와 작가님들로부터 자신의 책을 보내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학교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연대하고자 했다. 각자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하는 여성들이지만 아마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같았으리라. 아무도 해칠 수 없는 ‘고작 책’이라도 좋다. 페미니즘 책이 가득한 도서관이 잠시나마 서로의 지지를 주고받을 작은 매개가 되었기를. 덕분에 우리는 잠시의 지침을 뒤로하고 2020년을 시작할 용기를 얻는다.

 

2018년 크리스마스에 전달한 페미니즘 책 45권은 정말로 생수통보다 무거웠다. ⓒ heung_femi

 

*2019년 크리스마스에도 책 기부를 진행하며, 관련 소식은 twitter.com/heung_femi 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글. 리사 (cherry0226@goham20.com)

특성이미지. ⓒheung_fe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