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초상화 화가인 ‘마리안느(노에미 멜랑)’는 결혼을 앞둔 귀족 여성,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결혼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제안을 받고 브르타뉴의 한 섬으로 향한다. 엘로이즈의 집에 도착한 마리안느는 ‘소피(루아나 바야미)’의 도움을 받으며 엘로이즈 몰래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나간다. 그러나 그림을 그릴수록 마리안느는 점차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히고, 엘로이즈와 뜨거운 시선을 나눈다.  

 

느리고 정적이지만, 깊고 강렬한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느린 영화다. 한 장면의 길이가 길고, 화면 전환도 많지 않다. 두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도, 감정선을 묘사하고 전달하는 방식도 느릿하다. 그러나 강렬하다. 마치 그림을 그려내는 것처럼 쉽게 변화하지 않는 구도의 장면들은 인물들의 표정과 감정이 가득하다. 마리안느가 고심을 거듭하며 붓 터치 하나, 색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듯이, 영화도 순간적인 표정과 감정의 변화까지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한 장면 장면마다 힘을 주며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의 감정선은 매우 깊고 빠져나오기 힘들다. 늪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특히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이별하는 장면은 그중에서도 가장 감정적으로 강렬한 순간이다. 마리안느는 초상화를 다 그린 후 원치 않은 순간에 엘로이즈를 떠나게 된다. 이때 그녀가 마지막으로 엘로이즈를 되돌아보는 순간, 반쯤 어둠에 가려져 있는 그녀의 표정은 사람을 먹먹하고 가슴 미어지게 만든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엘로이즈와 마리안느 ⓒ그린나래미디어(주)

 

여성들의 시선으로 그려내는 그림과 신화

이 영화를 거칠게 요약하면, ‘화가와 모델이 서로 바라보는 과정을 2시간의 러닝타임 안에 꾹꾹 눌러 담은 작품’이라 정리할 수 있다. 작중 마리안느는 피사체인 엘로이즈의 모든 것을 관찰하고 캔버스 위 선과 색으로 옮긴다. 엘로이즈 역시 화가인 마리안느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관찰한다. “당신이 나를 바라볼 때 나는 누구를 바라보겠어요?”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둘은 살아 숨 쉬는 그림을 완성하고, 사랑에 빠진다. 그렇기에 영화는 많은 대화나 음악 없이도, 그저 두 주인공의 깊고 다채로운 눈빛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것만으로 사랑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

인물 간에 오고 가는 시선은 단순한 사랑의 표현을 넘어서 여성들의 연대를 상징하는 영화적 도구이기도 하다. 작중 소피는 임신중절의 고통을 쉬이 견디지 못한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본’ 후에 자신이 여성들 사이에 있음을 깨닫고 안정을 되찾는다. 엘로이즈 덕분에 간신히 버텨낸 소피를 ‘지켜볼’ 수 있었던 마리안느도 목격한 것을 그림으로 남기고, 소피의 선택과 고통에 위로를 보낸다. 이처럼 영화는 서로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을 때, 비로소 같은 시간과 공간을 진정으로 함께하며 서로에게 큰 힘이 되어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엘로이즈, 마리안느, 소피가 식탁에 나란히 앉아 각자 자기 일에 열중하는 일상이 극적으로 연출되지 않음에도 긴 여운을 주는 이유다.

사랑 이야기에서 여성들의 연대로 확장된 영화는 지난 세월 뿌리 깊게 내려온 신화를 다시 쓰면서 마무리된다. 엘로이즈를 떠난 후 마리안느는 ‘이별하는 순간의 에우리디케’라는,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신화 속 이야기를 캔버스 위에 펼쳐 보인다. 동시에 그녀는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만 하고, 아버지의 이름으로만 작품을 출품할 수 있었던 자신들의 이야기를 그림 안에 담는다. 이렇게 그리스 신화 속 비극으로 유명한 오르페우스 신화는 에우리디케의 시점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마리안느의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 신화’ 그림 ⓒ 그린나래미디어(주)

 

엘로이즈, 마리안느, 그리고 소피가 켜켜이 쌓아 올리는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영화는 끝이 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에도 자리에서 일어나기는 힘들 것이다.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마리안느가 마지막으로 바라본 엘로이즈의 떨리는 입가, 그녀의 흐르는 눈물을 잊을 수 없을 테니까. 또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인물들의 시선, 사랑, 신화, 그림, 그리고 음악이 말하는 처연한 사랑에 압도당할 테니까. 

 

글. DAY(potter1113@naver.com)

특성 이미지. ⓒ그린나래미디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