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혐오가 심한 나라일수록 여성들은 시간을 빼앗긴다. 여성들 스스로가 자신에게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고 믿게 함으로써 심리적으로 위축되게 만들고, 인생에서 좋은 날은 20대에 지나가버리고 30대 이후로는 더 나아질 수 없는 것처럼 절망의 주문을 걸어버린다.

 

– 릴리스, 《내 팔자가 세다고요?》 中 –

 

“여자애들은 교직 이수나 해라” 절망의 주문은 나를 갉아먹었다

스무 살, 대학에 입학한 첫날부터 알게 된 것은 진리의 상아탑이나 캠퍼스의 낭만 같은 것이 아니었다. 기울어진 운동장 끝에 서 있다는 현실이었다. “그래 봐야 여자는 공무원, 교사” 꿈을 깎아내리는 남교수에게 화를 내는 것도 3년쯤 되니 점점 순응하게 됐다. 어차피 내 노력은 견고한 차별 앞에서 흩어져 버릴 거라고. 마치 주문에 걸린 것처럼, 나는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다.

한 친구는 청약통장에 ‘스위스 안락사 적금’이란 별명을 붙였다. “국가는 혼자 사는 여성에게 집을 주지 않을 거고, 우린 여자니까 집을 살 돈도 벌지 못할 거야. 결국, 이 통장의 운명은 스위스 안락사를 위한 여비가 되겠지!^^” 미래를 상상하기 어렵다. 이러다 떠밀려서 결혼하고, 임신과 출산·육아로 경력이 뚝 끊기는 게 결국 내 미래일까? 그럴 바엔 차라리 (스위스에서) 죽어버리겠어! 우린 그저 남자한테 맞아 죽기 전에 무사히 스위스까지 간다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자조했다.

 

페미니스트 명리학자 릴리스의 《내 팔자가 세다고요?》 ⓒ북센스

 

페미니스트 명리학자에게 사주 상담을 받다

여자는 20대가 피크라는 소리,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라서 스물 넷, 스물 다섯까지가 유효기간이란 소리. 여성의 나이에 가해지는 가스라이팅에 지칠 대로 지쳐 나조차 나를 의심하게 될 무렵, 페미니스트 명리학자 릴리스님께 사주상담을 받았다.

“OO님 대운은 50대가 가장 좋네요.”
“네? 오오오오오십이라뇨! 너무 멀지 않나요?”
“아니죠. 이때가 딱 좋아요. 50대는 사회활동이 가장 왕성한 시기잖아요.”

 

내 50대의 대운이 가장 좋단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섬뜩했다. 오십까지 어떻게 존버하라고?! 릴리스님은 39세부터 57세의 중장년기가 열매를 맺는 완숙한 나무로서 삶의 전성기이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라고 했다. 그렇지. 맞는 말인데, 나는 왜 미래에 대한 설렘보다 섬뜩함을 먼저 느꼈나?

 

여성의 시간을 빼앗아 가는 생애주기

여자인 나에게 전성기가 절대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스위스 안락사’가 유일한 플랜이라고 여겼다. 나는 시간을 빼앗겼기 때문에. “여성혐오가 심한 나라일수록 여성들에게서 시간을 빼앗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좋은 날은 20대에 다 지나가 버리고 30대 이후로는 더 나아질 수 없는 것처럼 ‘절망의 주문’을 걸어버린다.” 하지만 내가 이대로 모든 걸 포기하면 결국 ‘절망의 주문’을 만든 이들이 원하는 엔딩을 순순히 갖다 바친 꼴이 된다.

 

릴리스님의 말은 50대 이후의 나를 상상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줬다. ⓒ프란

 

내 꿈을 야금야금 먹어 치운 ‘절망의 주문’과 작별하자

구닥다리 동화 속 공주는 주문을 풀기 위해 왕자에게 팔려 갔지만, 21세기엔 꼭 그럴 필요가 없지. 앞날이 암담하다고 해서 그걸 남에게 양도할 순 없는 노릇이다. “우리가 생을 살아가며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 일은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 아닐까? 여성을 걸어다니는 자궁쯤으로 취급하며 가임 지도나 그려대는 나라에서 태어난 것은 꽤나 불운한 일이지만, 최대한 많은 여성이 거부할수록 사회는 더 빨리 변할 수 있다고 믿는다.”[1]

2020년은 아주 오랫동안 내 꿈을 야금야금 먹어 치우던 ‘절망의 주문’과 작별할 때다. 그 주문을 푸는 해독약이 ‘백마 탄 왕자처럼 보이는 푸른 수염’과의 결혼은 아닐 테지. 나조차 나의 가능성을 믿지 못한 시절은 안녕. 50대를 단단히 준비하고 고대하며 20대, 30대, 40대를 버티기로 마음먹었다. 누군가 또다시 내 기를 꺾으려 한다면 이렇게 말할 거다. “저는 오십 대에 성공할 팔자라는데요?” 정말로! 여자 나이 오십, 성공하기 좋은 나이 아닌가?

 

ⓒ 책발전소 김소영 대표 인스타그램

장래희망 : 어린 여성들에게 40대도, 50대도, 60대도 정말 좋다고 말할 수 있는 할머니 되기

 

[1] 릴리스, 『내 팔자가 세다고요?』, 북센스, 2020, 76쪽

 

글. 리사(03hypen22@gmail.com)

특성이미지. ⓒ북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