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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떠난 예술은 없다

지난 2월 28일, 프랑스 최고 권위의 영화제인 세자르 영화제가 열렸다. 그 자리에는 최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엘로이즈 역을 맡은 배우 아델 에넬(Adèle Haenel)도 참석했다. 하지만 그는 곧 “수치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퇴장한다. 아동 성폭력 사건으로 수차례 고발당한 전력이 있는 감독 로만 폴란스키가 감독상을 수상한 직후였다.

 

자리를 뜨는 아델 에넬 ⓒabaca

 

“그들은 자신들이 표현의 자유를 보호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그들이 보호하는 것은 자신들의 발언의 독점권이다. 그들이 어젯밤 한 짓은, 우리를 다시 침묵으로 내몰고 우리에게 침묵할 것을 강요한 것이다.” – 아델 에넬, Mediapart 인터뷰 [1]

 

여성 혐오 논란이 있던 작품이나 성폭력 사건에 휩싸였던 남성 예술가들에겐 계속해서 변명거리가 붙는다. 사람들은 자꾸 사회적 가치를 떠나 예술 그 자체만을 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예술은 이 땅에 딱 붙어 사회와는 절대 떨어질 수 없다.

 

 

예술계를 망치러 온 구원자들

종종 예술계 내의 차별과 폭력을 폭로하는 자들에게는 예술 공동체와 그 역사를 망치는 사람이라는 오명이 붙는다. 하지만 과연 ‘불편함’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그 예술계를 망치러 왔을까? 그들은 원체 영화, 문학, 음악에 그다지 관심도 안목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단지 유명한 남성 예술가를 폄훼하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일까?

여성학자이자 평화학 연구자인 정희진은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 해결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로서 이 문제가 피해 여성 개인의 고통보다는 해당 집단(남성)의 명예와 관련되어 논의됨을 지적한다.[2] 이런 경향은 권위에 따른 위계가 탄탄한 예술계 내에서 더 도드라진다. 권위자 남성에 대한, 혹은 공동체 자체를 대상으로 한 고발은 집단의 “명예 실추”라는 낙인이 찍히곤 한다. 하지만 명예는 폭력에 대한 고발이 아니라 폭력이 발생한 그 시점에서 이미 실추되어 있었다.

 

권위에 당당히 맞선 용기 있는 고백들은 예술계의 오점보다는 구원자에 가깝다. 2016년에 시작된 #○○_내_성폭력  운동의 고발자와 연대자들은 대부분 예술계 ‘내’의 사람들이다. 그들이 숱한 차별과 폭력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지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들은 예술을 망치러 온 것도 아니고, 예술을 떠나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건강하지 않은 예술계 내의 불의를 바로잡아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단단하고 비옥한 땅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좋은 작품은 더 넓은 생각에서 나온다

예술 작품이라는 것은 제작자가 세상을 이해한 바를 표현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작품은 제작자의 세계관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가령 지독한 여성혐오자로서 여성은 수동적인 존재라고 굳게 믿는 소설 작가가 있다고 하자. 과연 그가 괜찮은 여성 캐릭터를 그려내는 것이 가능할까. 여성을 동등한 인간으로서 생각하지 못하는 자가 인간으로서의 여성의 내면을 그려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남성 중심적 시각에서 대상화되지 않은 여성 영웅 주인공이라는 이유로, 한때 PC함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MCU의 영화 캡틴 마블. ⓒ네이버 영화

 

어떤 사람들은 과도한 PC함(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이 작품을 망친다고들 한다. 사회에 적용되는 윤리적 기준과 예술 작품을 분리하지 않으면, 작품을 온전히 재미있게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PC함과 작품성은 서로 배타적인 관계에 놓여있지 않다. 오히려 기존의 사고방식에 갇히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창의력에 가깝다.

또한 자신들의 ‘재미’와 멋진 작품을 감상할 권리를 부르짖는 자들이 종종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 있다. 예술 작품에서 여성, 성 소수자, 장애인, 이주민과 같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하나의 유희 장치로서 소비하는 동안, 혐오의 당사자에게는 실질적 불이익이 뒤따른다. 누군가의 억압을 담보로 해야만 가치 있는 작품이라면, 그것은 ‘작품성’이라는 말로 포장될 뿐 그저 만연한 혐오의 답습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 전 한국 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는 여러 차례의 여성 혐오 논란을 빚었던 아티스트, 검정치마가 개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논란에 휩싸였던 앨범으로 상을 받았다. 한 선정 위원은 선정의 변에서 “해당 수상은 작품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비난만 남긴 모든 이들에게 날리는 시원한 어퍼컷”이라는 어록마저 남겼다. 미성년자 성 매수 전과가 있는 한 남성 배우는 사건 이후에도 50 작품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으며, 비슷한 전과의 한 남성 보컬은 곡을 발표하면 줄곧 음원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다.

페미니즘과 같은 사회적 가치를 기준으로 하는 비평이 예술을 망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이 지키고자 하는 남성 중심적 예술세계는 아직 망쳐지지 않았다. 세상은 여전히 남성 예술가들에게 끊임없이 기회를 주고, 그들의 논란 혹은 인성과 작품을 분리하여 찬양한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중심으로 하는 작품들은 사회와는 동떨어진 예술의 기준으로 평가되고, 상을 받는다.

 

구시대적 산물의 답습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위해 길을 터줘야 할 예술이 혐오와 폭력을 옹호하기 위해 “작품성”이라는 말로 어물쩍 넘어가는 것은, 아델 에넬이 세자르에서 자리를 뜨며 남긴 말처럼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예술성을 혐오의 핑계로 삼으며 인권 문제를 떠나려 하지 마라. 그 어떤 예술도 인권에 앞서지 않는다.

 

 

[1] “Cinéma français: la nuit du déshonneur”, Mediapart, 2020.02 

[2] 정희진, “인권과 평화의 관점에서 본 여성에 대한 폭력”, 정희진 엮음, «성폭력을 다시 쓴다», 한울아카데미, 2003,

 

글. 부추(ehdnsrla@gmail.com)

특성이미지. ⓒabaca

부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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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1. 봉돌

    2020년 3월 6일 15:11

    잘읽었습니다

  2. 익명

    2020년 3월 6일 15:37

    ? : 그래도 걘 연기는 잘하잖아, 노래는 좋잖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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