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가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가진다면,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의 습성을 가지게 된다면 그때에 기회가 도래하고 셰익스피어의 누이였던 그 죽은 시인이 종종 스스로 내던졌던 육체를 걸치게 될 것입니다.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지난 5~6월에 걸쳐 열린 청신호명동의 〈자기만의 방, 2020〉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여성 청년들이 온전히 자기자신으로 일과 생활을 영위하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주거의제 프로그램이다. 1929년에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들이 글을 자유롭게 쓰기 위해서는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했던 말은 오늘날의 여성청년에게도 유효하다는 취지에서 〈자기만의 방, 2020〉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상상하기-구하기-지속하기-공들이기-관계 맺기의 5회차로 구성된 프로그램은 우리가 집에 관해, 그리고 여성으로서 잘 살아간다는 것에 관해 갖고 있던 수많은 이야기를 종합선물세트처럼 모아 놓은 자리였다. 내 집과 삶에 대해 상상하며, 〈자기만의 방, 2020〉에 다녀온 고하미들이 짧은 후기를 남겼다.

 

 

당근야옹이 says:  “나의 방을 머무는 공간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기만의 방, 2020〉 첫 시간을 다녀왔다. 여성성과 남성성, 다양성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울프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는 하얀늑대(김민주)님이 강연과 워크숍을 진행하였다. 그는 사회에서 ‘여성성’이라 불리고, 자신에게 ‘취약함’이었던 연약한 힘을 내보였을 때 비로소 타인과의 다리가 생겼다고 말했다. 집을 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연약한 ‘힘’의 존재를 느낀 순간 울프하우스를 만들겠다는 용기를 냈다고 한다. 안전한 공간을 지향하지만 고립되는 방식이 아니며, 나의 독립성을 유지하지만 타인과 연결된 공간. 울프하우스는 물질적인 공간의 집이 아닌 여성으로서의 나를 표현하고 타인을 만나는 ‘house’가 되었다.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진 후 나의 취향, 가치관, 좋아하는 것 등, 자신의 집을 상상하고 그려보는 시간을 가졌다. 2년 넘게 자취 생활을 하고 있지만 나의 방을 ‘머무는 공간’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를 시작하고 끝내는 곳이 나에게 어떤 의미이고 앞으로 어떤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는지 생각해보았다. 내가 원하는 자기만의 방은 좋아하는 사람들이 오고 싫어하는 사람들은 오지 못하는 곳. 방 안에서 크고 작은 소리가 나는 공간이다. 대화는 우리를 더 가깝게 하고, 사람들을 초대하는 집은 소리가 나고 활기를 띤다.

혼자만의 시간에서도 ‘소리’는 어떤 신호가 될 수 있다. 무기력하고 우울에 빠져 있을 때, 나의 집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끝없는 침묵 혹은 의미 없는 유튜브 동영상 소리뿐이다. 그 우울에서 일어나 나를 위한 요리를 하고, 창문을 열어놓고 대청소를 하거나 음악을 들을 때 비로소 집은 소리를 가진다. 이 ‘소리 있는 집’을 위해 열심히 살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달걀껍질 says: “결혼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을까?”

3회차 강연을 맡은 건 여성생활문화공간비비협동조합(이하 비비)의 김란이님이었다. 비비는 전주에서 비혼 여성 6명이 시작한 작은 커뮤니티였다. 정기적으로 독서토론을 진행했는데, 삶과 죽음에 대한 책을 함께 읽다 보니 자연스레 서로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비비는 서로를 돌봐줄 수 있는 노후를 꿈꾸게 된다. 그들은 같은 아파트에 입주하고, 함께할 수 있는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었다. 현재 50명의 회원이 그 공간에서 비혼여성의 삶을 공유하고 있다. 비비의 가장 큰 목표는 여성 공동 주거 공간. 파리에 위치한 ‘바바야가의 집’, 런던의 ‘OWCH’ 등을 탐방하며, 여성이 여성과 함께 불안 없는 노후를 보낼 수 있는 미래를 준비하는 중이다.

홀로 늙어가는 것이 정말 내게 맞는 선택인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가 있다. ‘지금은 결혼하고 싶지 않지만, 노후가 외롭지 않을까?’ ‘결혼하고 싶어도 마땅히 할 사람도 없는데?’라고 던지던 질문에 김란이님의 삶은 꽤 좋은 답이 되어주었다. 외롭지 않은 여성의 노후에 꼭 남성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 어쩌면 이성이 없기에, 이성으로부터의 불완전한 애정을 갈구하지 않아도 되기에, 그 공간은 더욱 외로움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결혼으로 인해 인생이 망한 여성의 이야기는 많아도 결혼하지 않아서 망한 여성의 이야기는 없다. 그런데도 사회는 수많은 여성의 이야기가 남성에 의해 좌우되도록 해왔다. 여성은 사랑하는 남성의 도움으로 성공하거나, 사랑하는 남성에 의해 망가졌다. 모든 여성의 이야기가 그랬다. 그러나 비비는 남성이 없는 여성의 삶을 조금씩 완성해 나가고 있다. 가부장제에 종속되지 않고도 그들은 홀로이면서 또 함께하는 여성들만의 서사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노후에 대한 걱정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나에겐 ‘여성들과 함께 사는 노후’가 ‘유니콘 같은 배우자를 찾아 완벽한 결혼생활을 하는 노후’보다 훨씬 현실적인 대책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총총 says: “내가 바라고 원하는 ‘자기만의 방’에 한 발짝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 막 자취를 시작하는 내게 오랫동안 자취를 해온 친구가 말했다. ‘돈이 아깝다고, 어차피 월셋집이라고 아무거나 주워 와서 대충 살지 마. 나도 자취 시작할 때 돈이 없어서 주워온 가구들로 생활했는데 내 집이 아니라 남의 집에 사는 기분이었어.’ 자기가 원하는 가구들로 방을 채워 넣을 때 집이 비로소 마음에 드는 곳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모자란 잔고를 아껴 거실에 둘 널찍한 식탁과 의자를 샀다. 후에 그곳은 내가 집에서 제일 좋아하는 공간이 되었다.

4회차 강연을 맡은 공간디렉터 최고요님은 ‘내가 원하는 집’을 가꾸기 위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는 분이었다. 사진과 함께 그분이 살아온 ‘집의 연대기’를 들으며 그 실행력과 결단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사할 집의 바닥을 검은색으로 바꾸기 위해 바닥에 칠할 수 있는 페인트를 ‘찾아 회사들에 이메일을 보내기도 하고, 원하는 디자인의 싱크대 상부장을 찾아다니다가 책장을 달기도 하고, 맘에 든 소품이 비싸서 을지로에서 비슷한 것을 구해다가 스프레이로 칠하기도 하고.  

고요님은 때로는 서툴고 무모했으나 이 모든 게 좋은 시도였다고 말했다. 그때의 시행착오가 없었다면 지금의 일을 이렇게 잘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경험들이 쌓여서 내 집에서 타인의 집으로, 미술관, 카페 등의 공간으로 점점 가꾸는 공간의 범위를 넓혀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집의 구석, 모퉁이 하나 대충 두지 않고 정성을 들여 돌보는 것은 삶을 대하는 방식이자 행복’이라고 말한다.

강연을 들으며 내가 원하는 집을 꾸미기 위해 꼭 많은 돈을 들여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트지를 붙이고, 손잡이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가구를 다른 느낌으로 바꿀 수 있고, 집을 깔끔히 정리정돈하고 좋아하는 소품을 잘 보이는 곳에 진열해두는 것만으로도 내 취향에 맞는 공간을 만들 수 있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자기만의 방’에 한 발짝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글. 당근야옹이(carrot3113@naver.com), 달걀껍질(kyeory000@naver.com), 총총(ech752@naver.com)
특성이미지. ⓒ청신호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