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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서 굴리던 말들] ① J에게

여자들은 마음에 담아둔 말이 많았다. 입에서만 굴리던 말들을 드디어 뱉는다. 여성의날을 맞이하여 흘려 보내지 않고 붙잡아 둔 인생의 한 줄기를 글에 담았다. 각자 다른 목소리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끝에는 늘 여성들이 살아갈 세상이 있다. 어떤 눈물도 의심받지 않고 어떤 행복도 감히 꿈꿀 수 있는 세상. 그 세상을 좇는 네 편의 이야기.

 

‘어린 여자로 산다는 건 너무나 지겹고 피곤한 일이다.’ 스물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던 어느 날의 일기에 나는 그렇게 적었어. 너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거야, 그맘때 우리 인생은 투쟁 그 자체였으니까.

 

나는 좀 체념했던 것 같아. 오랫동안 품고 있다가 간신히 용기 내 내뱉은 이야기가 칼로 돌아오는 일이 얼마나 많았니? 그럼에도 숨어 버리면 사람들이 정말로 내가 잘못했던 거라고 믿을까 봐 꼿꼿이 고개를 들고 다녔어.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어두운 골목에서는 매번 홀로 울었지. 그러다 너를 찾은 거야.

 

J야, 너는 내가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용감한 사람이었어. 그 사실은 언제나 변치 않아. 학교에서, 가정에서, 일터에서 어리고 취약한 여성으로서 겪게 되는 폭력에 대해 얘기하고 분노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지. 네가 붙인 학내 성폭력 공론화 대자보를 읽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저 글을 쓴 게 나인데, 방금 했던 말을 내 면전에 대고 다시 한번 해보라’고 당당히 쏘아붙였고. 너는 투사였어. 늘 나의 자랑이었지.

 

그래서였을까, 네가 떠난 일이 아직도 되새기기 어려운 상처로 남았던 것은. 너의 강한 모습을 사랑했으면서도 정작 위태로울 때는 붙들어주지 못한 게 무거운 마음의 짐이 되었어.  

 

그 일 이후로 나는 줄곧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면서 살았어. 너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로부터. 발인 때 곁에서 쓰러지며 울던 낯익은 얼굴들도, 같이 가기로 했던 학교 앞 돈까스집도, 너에 대한 감정도 마주하기 두려워서 멀고 먼 길을 돌아 도망쳤어. 가능하다면 전부 아주 없던 일처럼 잊어버리고 싶었지. 그게 외려 마음 한구석에서 너에 대한 죄책감을 키워나가고 있었던 줄은 모르고.

 

종종 그런 상상을 해. 다시 너를 만나서 이제는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우리가 겪었던 폭력이 더는 전처럼 흔치 않은 세상이 되었다고 말하는 상상을. 하지만 세상은 좀처럼 쉽게 바뀌질 않고 너와 닮은 죽음이 반복될 때마다 나는 참 많이도 울었어. 무너지는 순간들이 참으로 많았어.

 

하지만 J야, 너를 슬픔만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이 편지를 써. 여러 순간 너는 내게 위로였고, 아직까지도 나의 자랑이야. 다 잊기 위해 도망치던 날들 속에서도 널 생각하면 힘을 얻을 때가 있었어.

 

누군가 그렇게 말하더라, 흔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회복탄력성을 익히듯이. 여러 번 주저앉으면서도 결국 일어나 나는 이제 글로 내가 겪은 아픔을 풀어낼 줄 아는 사람이 되었어. 너를 닮은 용기를 가지고.

 

얼마 전에 읽었던 문장을 약속 같은 다짐으로 삼아 글을 마칠게.  

“나는 아주아주 행복한 사람으로 죽을 거야. 아무도 그걸 못 막을 거야.”[i]

 

항상 나의 용기였던 J에게,

사랑을 담아.

 

[i] 김지연, 〈사랑하는 일〉 中

 

글. 총총(ech752@goham20.com)

특성이미지. ⓒ고함20 / 김지연, 〈사랑하는 일〉 中 발췌한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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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
  1. 부추

    2021년 3월 9일 07:34

    너무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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