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마음에 담아둔 말이 많았다. 입에서만 굴리던 말들을 드디어 뱉는다. 여성의날을 맞이하여 흘려 보내지 않고 붙잡아 둔 인생의 한 줄기를 글에 담았다. 각자 다른 목소리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끝에는 늘 여성들이 살아갈 세상이 있다. 어떤 눈물도 의심받지 않고 어떤 행복도 감히 꿈꿀 수 있는 세상. 그 세상을 좇는 네 편의 이야기.

 

‘영’은 고작 열네 살에 자신의 어머니를 여의었다. 엄마가 없는 아이인 걸 티가 나게 행동하면 안 된다는 아버지의 말에 영은 무엇이든 참는 법부터 배웠다. 영에겐 두 살 터울의 언니와 네 살 터울의 오빠, 그리고 자신보다 한참 어린 남동생이 있었기에 그리 주목받는 삶을 살지 못했다.

 

영이 스물여섯 살에 만난 남자는 그런 영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었다. 남자는 키가 크고 눈썹이 짙어 차가운 이미지였지만, 어딘가 어린 아이 같은 구석이 있었고, 무엇보다 공감 능력이 뛰어났다. 남자는 어린 나이에 가족을 잃은 영의 슬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고, 영은 그런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우산을 들고 영의 집 앞으로 찾아왔으며, 둘은 파전에 막걸리를 마시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과 남자는 그렇게 사랑을 키워나갔다.

 

영은 남자와 결혼을 결심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쉬운 것이 없었지만, 사랑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남자는 종종 술을 마시면 연락이 끊겨 영을 걱정시키곤 했지만, 영은 하루 이틀 그러다 말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영에게 그는 술만 빼면 완벽한 남자였기에, 많은 이들의 축복 아래 영은 스물여덟, 남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영은 안정적인 가정을 꿈꿨다. 자식들에겐 헌신적인 엄마가, 남편에겐 현명한 아내가 되고 싶었다. 영과 남자는 대출을 받아 소박한 신혼살림을 꾸렸다. 언젠가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아파트를 얻고,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고 나면 작은 공부방을 차리는 것이 영의 유일한 꿈이었다. 결혼 1년 후, 선물 같은 첫 아이가 찾아왔다. 영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자신의 몸을 보면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지만, 엄마가 되려면 그 정도는 견뎌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을 떠올렸다. 남자는 결혼 후에도 여전히 술자리가 잦았지만, 영이 임신 중 먹고 싶은 음식이 생길 때마다 동네를 다 뒤져서라도 찾아왔기에 영은 그가 자신을 진정으로 아끼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듬해 여름, 첫 아이가 태어났다. 영과 남자는 팔뚝보다 작은 아이를 보며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남자는 돈을 벌려면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자가 출근하면 텅 빈 집 안엔 영과 갓난아이만이 남았다. 영은 유난히 자주 울고 보채는 아이를 달래며, 밀린 빨래와 설거지를 하는데 하루를 다 쏟았다. 달콤한 신혼 생활 같은 건 없었다. 온종일 집안일을 하고 나서도, 남자가 집에 돌아오면 영은 부리나케 달려 나가 그의 옷을 정리하고, 그가 먹을 밥을 차렸다. 남자는 퇴근 후에도 술을 마셨다. 영은 그가 술을 마실 때마다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지만, 회사 생활이 힘든 탓이라 생각하며 군말 없이 남자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남자가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하자, 생활은 점차 나아졌다. 영은 통장에 빼곡히 찍힌 숫자들을 보며 아파트로 이사 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영과 남자의 얼굴을 반씩 닮은 아이는 어느덧 눈에 띄게 자랐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영의 어깨를 주무르기도 했다. 얼마 안 가 영은 둘째 아이를 임신했다. 남자는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큰 꽃다발을 내밀며, 영을 꽉 껴안았다. “내가 더 잘할게. 고마워.” 영은 남자와 결혼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열 달 뒤면 세상에 나올 둘째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첫째 아이, 자신만을 바라보는 다정한 남자. 모두 영이 꿈에 그리던 것이었다.

 

애석하게도 영의 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남자는 얼마 안 가 음주운전으로 큰 사고를 냈다. 설상가상으로 남자가 보증을 섰던 남자의 동창과 연락이 끊기며 집 안 군데군데 빨간 딱지가 붙기 시작했다. 충격을 받은 남자는 영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직장을 그만두고, 집 안에 틀어박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남자가 인사불성이 된 채로 영에게 심한 욕을 퍼부어도, 영은 잠든 아이의 귀를 막고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랄 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음 날이면 남자는 영에게 죽을죄를 지었다며 무릎을 꿇었고, 영은 그런 남자를 모른 체할 수 없었다. 결국 영은 무거운 몸과 마음을 이끌고 전단을 붙이며 생계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영의 속옷에 피가 비쳤다. 유산이었다.

 

 

여기, 또 다른 영이 있다. 영은 올해로 스물여섯, 평범한 취업준비생이다. 영은 오전엔 토익 학원에 다니고, 오후엔 작은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다. 취업 준비에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하며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밀린 학자금 대출을 생각하면 뾰족한 수가 없기에 영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이러한 생활을 몇 달 째 이어나가고 있다. 영의 유일한 취미는 자기 전 짧은 글을 쓰는 것으로, 언젠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책을 내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영은 퇴근 후 오랜만에 고교 동창들을 만났다. 떡볶이와 노래방, 스티커 사진만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던 친구들이 언제부턴가 모이면 자연스럽게 결혼 이야기를 꺼낸다. 영의 절친 A는 4년째 교제 중인 남자친구와 결혼을 생각하고 있고, 또래에 비해 이른 결혼을 한 B는 벌써 돌이 지난 아들을 키우고 있다. 영은 문득 이 상황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영의 표정을 읽은 B가 익숙하게 아이에게 이유식을 먹이며 물었다. “영, 너는 진짜 비혼 결심한 거야?” 영은 대답 대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영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영의 아빠는 사업을 시작한 뒤로 술에 잔뜩 취한 채 집에 들어오는 일이 잦았다. 그는 취기에 돈 아까운 줄 모르고 비싼 물건들을 마구 사들였고, 무엇보다 술을 마시면 운전대를 잡는 고약한 버릇이 있었다. 영의 부모는 자주 다퉜다. 대부분 돈 아니면 술 때문이었고, 종종 다른 여자 이야기가 오가는 때도 있었다. 영의 동생들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뗄 만큼 어렸기에, 새벽마다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부모의 싸움 소리를 듣는 것은 온전히 영의 몫이었다.

 

결국 영의 부모는 영이 열아홉 살 무렵 별거를 시작했다. 영의 아빠는 음주운전으로 몇 번이나 면허를 박탈당했고, 영의 엄마는 더이상 참을 수 없다며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집을 나갔다. “영, 네 동생들이 클 때까지만 참아줘.” 영은 고작 열아홉 살에 엄마의 자리를 대신해야 했다.

 

영의 아빠는 여전히 술을 마셨다. 그는 술에 절어 길거리에 누워있거나 택시에서 난동을 부려 경찰서 신세를 지곤 했다. 침과 토사물로 범벅이 된 채 포대 자루처럼 늘어져 잠든 아빠를 보며, 영은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 꿈틀거림을 느꼈다. 그것은 지난 20년간 남편의 수발을 들어온 자신의 엄마에 대한 안쓰러움이기도, 아직 어린 동생들을 지켜야 한다는 장녀의 책임감이기도 했지만, 영은 무엇보다 자신의 선택이 아닌 불가항력으로 주어진 이 상황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영은 엉망진창이 된 채 잠든 아빠의 얼굴과 지린내에 축축이 젖은 걸레를 번갈아 보며 생각했다. 나는 반드시 이 고통의 굴레를 끊어버리리라. 나의 자식에게 거부할 수 없는 불행을 물려주지 않으리라. 듣는 이 하나 없는 새벽, 영은 뜨겁게 차오르는 눈물을 삼킨 채 다짐했다.

 

 

두 명의 영으로 표현된 이 글은, 사실 나와 내 어머니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아프면 참았고, 슬프면 견뎠다.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고, 그것이 정답인 줄 알았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이름보다 누군가의 엄마, 아내, 딸이 되어 그림자(影) 같은 삶을 살았다. 이 글은 그들을 위해 쓰였다.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억겁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나에게, 나의 어머니에게, 세상의 수많은 영들에게.

 

글. 로움(goham.roum@gmail.com)

특성이미지. ⓒ고함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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