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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서 굴리던 말들] ④ 어떤 게 아닌 사랑

여자들은 마음에 담아둔 말이 많았다. 입에서만 굴리던 말들을 드디어 뱉는다. 여성의날을 맞이하여 흘려 보내지 않고 붙잡아 둔 인생의 한 줄기를 글에 담았다. 각자 다른 목소리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끝에는 늘 여성들이 살아갈 세상이 있다. 어떤 눈물도 의심받지 않고 어떤 행복도 감히 꿈꿀 수 있는 세상. 그 세상을 좇는 네 편의 이야기.

 

어떤 사랑은 가을에 시작됐다.

 

우리는 매일 같이 만나 술을 마셨다. 술을 지독하게 좋아하던 시절이었다. 참이슬과 처음처럼의 맛을 구별해가며, 소주 한 잔을 한입에 털어 넣기보다는 네 모금으로 나눠서 천천히 음미하며 음주를 즐기던 때였다. 그니까 한 마디로, 제대로 기억나는 날들이 없는 계절이었다. 그래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기억하는 밤이 있다. 탈코르셋, 그거 의미 없다며 주정 부리던 너는 나에게 질문을 해왔다. 그게 뭐야, 너는 왜 한 거야. 탈코하고 나서 뭐가 달라진 거야. 네 세상은 어떤 곳이야.

 

결국에 너는 답을 찾으러 미용실로 향했다. 허리춤까지 오던 긴 머리를 단번에 싹둑 잘라버렸다. 네 목덜미에 가을바람이 불었다. 머리카락에 덮였던 귀와 목과 등이 바람을 맞고 자라나는 듯했다. 날개라도 새로 단 듯이 너는 가벼워 보였다. 짧은 머리에 한껏 신난 모습으로 너는 깡충깡충 뛰어다녔다. 그길로 또 술을 먹으러 갔다. 그리고 그다음 날도, 그 다음다음 날도. 까슬한 머리가 길 새도 없이 우리는 신만 나면 술을 먹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술을 먹지 않아도 시간을 재밌게 보내는 법을 알게 되었다. 길을 걸으면 쉬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 고양이가 나타나면 고양이처럼 말을 했고, 대낮에 달이 뜨면 고개를 뒤집어 바라봤다. 해가 바뀔 때는 노래를 틀고 울었고, 시험 기간에는 도서관에서 카트라이더를 했다. 이건 우정이었고 사랑이었다. 어떤 추상 명사를 붙여도 다 말이 됐다. 삶. 고요. 슬픔. 기쁨. 절망. 소망. 용기. 아무튼, 아무거나 다 되는 관계였다. 우리는 가족이었고 친구였고 애인이었다. 뭐든 막 갖다 붙여도 됐지만, 이건 배워야 알 수 있는 거였다.

 

세상은 길 만들어 가는 여자에게 가르쳐주지 않은 게 많았다. 길 위에서 화내다가 쓰러진 여자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했다. 모두가 화나서 소리 질러 대는 가운데서도 자기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게 했다. 그 길 위에는 너 혼자뿐이야, 세상이 말했다. 여자들을 외롭고 외롭게 만들었다. 혼자 되고 지친 여자들이 기댈 곳을 정해두었다.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간 그들은 자기 목소리마저 듣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내 친구들이 사라지는 걸 보기가 힘들었다.

 

너는 내게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줬다. 기대고 의존하고, 감싸 안기고, 이런 피동의 모양과는 다른 것이었다. 세상에 너처럼 따라와 질문하는 여자가 있다는 목격의 경험은 나한테 죽을 때까지 살 힘을 줬다. 너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진다 해도 이 사랑은 계속될 테다. 우리는 서로에게 사랑이 사랑일 필요 없음을 배웠다.

 

내 안에 자리 잡은 이 알 수 없는 추상 명사는 내가 다른 질문들을 마주하고, 질문의 얼굴들을 바라볼 때마다 다른 여자들에게 이식된다. 그들은 내게 사랑인지 뭔지, 사실 이름은 상관없는 어떤 걸 주었고, 나도 그들에게 내 세상을 보였다. 서로의 상처를 보고도 깔깔대며 웃을 수 있었다. 여기서는 흐린 눈으로 뭔갈 참아야 할 필요가 없었다. 술 한잔 짠, 하고 밤늦도록 기억도 나지 않는 얘기를 하다가 집에 같이 가서 또 킬킬대며 아무 말 하고는 늘어지게 잠을 잤다. 해 우두커니 뜨면 보리차 벌컥벌컥 마시고 까슬한 머리 대충 비비고 헤어졌다. 술값 보내라는 연락마저 없어도 우리는 서로를 사랑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떤’ 사랑은 가을에 시작해서 ‘어떤 게 아닌’ 사랑이 되었다. 점 하나 찍고 이게 사랑이야, 하던 시절을 지나 이제 여자들은 그 점 빼고 남은 세상 전부가 사랑이라고 말한다. 호명할 대상 없이 존재하는 사랑은 구별 없이 여자들 사이를 유영한다. 어느 날은 가슴에 울컥 차오르기도 하고, 다른 날은 길 걷다 푸흐흐 하는 웃음에 섞여 나오기도 한다. 사랑의 얼굴도, 이름도 몰라도 여자들은 그게 뭔지 알 수 있다. 혼자 있어도 혼자 되지 않았음을 느끼게 하는 그 공기가 무엇인지는 주변 여자들이 분명 가르쳐줬다. 우리는 그 공기로 호흡한다.

 

사랑은 여름 뙤약볕에 녹았다가 겨울 되니 얼기도 했다. 얼고 녹기를 반복하면서도 줄지를 않았다. 봄이 왔다. 봄바람이든, 봄비든 뭐든 타고 사랑은 여자들 곁으로 간다.

 

물론 끝날 리 없다.

 

글. 기동(mer.gidong@goham20.com)

특성이미지. ⓒ고함20

기획[입에서 굴리던 말들]

기획. 기동, 채야채, 총총, 로움

2 Comments
  1. ㅁㅁ

    2021년 3월 12일 14:42

    썸네일 글씨는 직접 쓰신 것들인가요??

    • 기동

      2021년 3월 12일 14:48

      네 각 기자들이 직접 썼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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