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史)상 가장 유명한 ‘악당의 차’는?

첩보영화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에게는 ‘애스턴 마틴’이 있고, 그의 적 미스터 힝스는 ‘재규어’를 탄다. 이로 인해 영국 자동차 ‘재규어’는 악당의 차’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007 스펙터〉와 비슷한 시기 제작된 ‘재규어’ 광고는 “악당은 재규어를 탄다”는 카피라이트와 함께 악역으로 인지도 높은 배우들을 등장시켰다. 영화 속 자동차는 이렇게 배역의 이미지를 만들어 주면서 동시에 그 배역을 통해 브랜드의 이미지를 구축하기도 한다.

 

영화 크루엘라 포스터. 크루엘라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영화 〈크루엘라〉 포스터 ⓒ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그렇다면 여성 악당은 어떤 차를 탈까? 영화계는 오랫동안 여성의 자리를 운전석이 아닌 보조석에 두었다. 제임스 본드와 ‘애스턴 마틴’, 미스터 힝스와 ‘재규어’처럼 여성 캐릭터와 자동차가 쉽게 연상되지 않겠지만, 여기 영화사(史)상 가장 아이코닉한 운전자이자 악당, ‘크루엘라 드 빌(Cruella De ville)’이 있다.

 

‘데빌(dev il)’이라 쓰고 ‘드 빌(de ville)’이라 읽지”

그가 차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차는 그에게로 와 그의 이름이 되었다

글렌클로즈가 주연한 〈101마리 달마시안(1996)〉, 이를 재각색한 영화 〈크루엘라(2021)〉의 주인공 크루엘라는 팬더 웨스윈드사의 자동차 ‘드 빌(De ville)’을 몬다. 그의 악명과 비슷한 이름의 이 차는 사실 프랑스어로 ‘도시’라는 평범한 뜻을 가졌다. 크루엘라는 번호판의 철자 L과 E를 떼어내서 ‘DEV IL(악마)’로 만들어 타고 다닌다.

 

애니메이션 101마리 달마시안 중 크루엘라가 운전하는 장면
애니메이션 영화 〈101마리 달마시안〉 스틸컷 ⓒ월트디즈니 컴퍼니

 

1961년 – ‘이 구역의 미친 드라이버’

원래 애니메이션 영화 〈101마리 달마시안(1961)〉에서 ‘드 빌’이란 자동차 이름은 없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운전자’라는 크루엘라의 정체성은 아주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 셀 애니메이션 안에서 그는 악마처럼 거친 가혹 주행을 선보인다. 눈보라에 굴하지 않고 드리프트를 하는가 하면,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 울타리를 뛰어넘는다. 그 거침없는 돌진에 놀란 트럭 운전사는 “저 미친 여자 운전자! (Crazy woman driver!)”라고 외친다.

그렇다. ‘이 구역의 미친 운전자’, 차가 점점 망가져 감에도 운전대를 꼭 붙들고 있는 여자, 모든 걸 잃어도 자신의 통제권만큼은 끝까지 잃지 않으려는 여자가 바로 ‘크루엘라’다.

 

크루엘라가 타는 검정색 승용차 '드 빌'
글렌 클로즈가 주연한 실사영화 〈101마리 달마시안〉 스틸컷 ⓒ월트디즈니 컴퍼니

 

1996년 – ‘데빌’의 등장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차, 팬서 웨스트윈드사의 1974년형 ‘드 빌’은 1996년 개봉한 실사영화 〈101마리 달마시안〉에서 첫 등장했다. 부유한 사업가지만 절대 운전기사를 쓰지 않고 직접 운전하는 크루엘라(글렌 클로즈). 그는 뭐든지 남의 손 빌리기를 싫어한다. ‘드 빌’은 원작 애니메이션과 꼭 닮은 모양에 색깔만 자주색에서 흑색과 백색으로 바뀌었다. 달마시안을 쫓는, 달마시안의 색을 가진 차. 목표물에 대한  집착이 강렬하게 표출된다.

 

여기서도 그의 운전 실력은 정말이지 흉악한데, 중앙선 침범과 기물파손을 일삼으면서 길 건너는 강아지가 보이자 급정거를 하는 따뜻한(?) 모습도 보인다.

 

엠마 스톤이 연기하는 크루엘라. 운전대를 잡고 있다.
영화 〈크루엘라〉 스틸컷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2021년- 내 길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

배우가 바뀌어도, 시대가 흘러도 그의 애마(愛馬)는 여전히 ‘드 빌’이다. 다만 극 초반 〈크루엘라〉(2021)의 크루엘라(엠마 스톤)는 운전을 배운 적 없는 사람으로 나온다. 적으로부터 탈출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무면허 크루엘라는 과감하게 운전대를 잡는다. 하지만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잔뜩 긴장한 채 여기저기 부딪히고 비틀비틀 위태롭다.

 

그러나 잠시의 방황을 뒤로 하고 새로운 계획과 함께 다시 시동을 걸었을 땐, 더이상 갈 길을 모르는 에스텔라가 아니었다. 착한 아이 에스텔라를 깨고 새로 태어난 ‘크루엘라 드 빌(devil)’은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는다.

 

크루엘라의 마지막 대사, “나한테 계획이 있어”

 

결국 운전이란 행위는 계획이 있어야만 시작할 수 있다. 아무리 뛰어난 인공지능 내비게이션도, 자율주행 자동차도 운전자에게 계획이 없다면 무용하다. 아예 어디론가 가야 할 필요를 모르는 사람에겐 자동차조차 무용하다.

 

그렇기 때문에 ‘운전자’라는 행위적 정체성은 ‘디자이너’라는 직업적 정체성보다 그의 본성을 더 정확하게 설명한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내 힘으로 가고자 하는 본성.’ 그래서 크루엘라는 1961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자기만의 차를 몰고 이동하는 것이다.

 

엔딩 크레딧이 내려간 후 그가 어떤 계획으로 살아갈지는 모르겠다. 다만 ‘드 빌’의 운전석은 앞으로도 쭉 그의 차지란 사실 하나만은 확신한다. 차도, 인생도 절대 남에게 맡기지 않는 사람이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새롭게 태어난 크루엘라는 사랑하는 것을 위해 남은 자리를 기꺼이 내어줄 사람이란 것. 목표물만 쫓던 과거와는 달리 옆자리에 앉은 반려견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드라이브를 즐기는 크루엘라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p.s. 개 키우려면 역시 차가 필요하죠.

이 기사는 [자기만의 차] 기획의 일부입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의 자립을 위해서 자기만의 방과 500 파운드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여기에 ‘차’를 더하고 싶습니다. ‘자기만의 차’는 여성이 ‘자기만의 방’ 바깥 세상에서도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합니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되었습니다.

 

글. 리사(cherry0226@goham20.com)

특성이미지.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