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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나가는 여자들] 내가 당신을 용서할 수 없는 이유

오늘도 나는 문 앞에 서 있다. 이 문을 열면 어떤 세상이 나올까. 한참을 망설이다 문고리를 툭 건드려 본다. ‘집을 나가야만 해.’오랜 시간 외면해 온 당신의 감각을 깨우는 고함의 기획 기사, 〈집 나가는 여자들〉. 딸들은 이미 알고 있다. 차마 열어보지도 못한 문 너머에 가장 나다운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 함께 손잡고 나가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 본 기사는 가정폭력에 대한 묘사와 트리거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딱 이맘때의 일이었죠. 지금처럼 무덥던 여름, 8월, 텁텁한 공기가 목을 조여오던 밤. 겨우 스무 살이던 나에게 당신이 “씨X년”이라고 욕을 하며 손찌검을 한 바로 그날 말이에요.

그날은 무지 더웠어요. 수능을 거하게 말아먹고 독학 재수를 하던 저는 늘 그렇듯 아침마다 첫 버스에 무거운 몸과 마음을 싣고 독서실로 갔습니다. 밖은 밝고, 시끄럽고, 생생했어요. 양손에 부채나 아이스크림을 들고 걸어가는 학생들의 싱그러움이나, 찐 옥수수와 전병 따위를 파는 시장의 소란스러움 같은 것들이 좋았죠. 아, 그땐 지금처럼 마스크를 쓰지도 않았고요.

같이 공부하던 친구는 그런 풍경을 두고 독서실에 가는 걸 참 싫어했어요. 너무 어두워서 살아있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나 뭐라나. 별 대답 없이 작은 웃음으로 대꾸하면, 넌 참 별나다며 핀잔을 주기도 했어요. 그 어둡고 좁은 공간에서 열 시간이 넘도록 공부를 하는 게 독하다며 말이죠.

그런데 사실, 저에겐 그 1평 남짓한 공간이 절실했어요. 새벽 내내 잔뜩 몸을 웅크리던 곳에서 벗어나, 참아왔던 숨을 뱉어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거든요. 당신도 잘 알다시피 우리 집은 그렇게 넓지 않고, 거실에서 내는 소리가 다락까지 들리잖아요. 소주병이 바닥에 구르는 소리, 변기에 머리를 처박고 속을 게우는 소리, 책이나 필통이 벽에 부딪혔다 떨어지면 나는 둔탁한 소리 같은 것들이요.

아, 가끔 도어락을 마구 눌러대다 오류가 나면 ‘니나니나 니 고릴리야’하는 기계음이 울릴 때도 있었고요. “OOO 씨 따님 되십니까” 하며 현관문을 두드리는 경찰관의 목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어요. 저는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한데, 아마 당신은 술에 잔뜩 취해있었기에 잘 기억을 하지 못할 거예요. 그렇죠, 아빠?

​​

 

아빠. 아빠가 제 키보다 더 높이 손을 뻗었던 날로부터 딱 6년이 흘렀어요. 고작 스무 살이던 저는 어느새 스물여섯 살이 됐고요.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대기업은 아니라도 꽤 번듯한 직장에 들어갔죠. 조금 버겁긴 해도, 이제 더는 아빠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도 살아가고 있어요.

6년 전보다 몸도 마음도 약해진 아빠가 물었죠. 힘들지 않냐고. 월세도, 식비도 자신이 대줄 테니 에서 지내는 건 어떻겠냐고. 솔직히 조금 솔깃했어요. 원래 타지에서 생활하면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잖아요. 삼각김밥에 컵라면 하나만 사도 삼천 원인데, 하루 세끼는 먹어야 하고. 그러면 한 달에 삼, 사십은 기본이고. 가계부라도 쓰고 있으면 골치가 아파요. 아, 제가 언제부터 이렇게 계산적인 사람이었죠?

 

아무튼, 그 제안은 퍽 괜찮았지만, 이제는 정말 거절하려고 해요. 아빠가 늘 말씀하시잖아요. 밖에 나가면 개고생이라고. 집에서 엄마가 차려주는 밥 먹고, 아빠가 하던 일 물려받아 밑에서 일하면 되는 거라고. 자식이 건강하게 곁에 있는 게 최고의 효도인데, 왜 멀쩡한 집을 두고 연고 하나 없는 타지로 떠났는지 모르겠다고.

그런데요, 아빠. 실은 저 알고 있어요. 아빠가 과거의 일이 떠오를 때마다, 당신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돈으로 절 회유한다는 사실이요. 아빠가 그 많은 술을 다 마신 건 돈이 없어서였잖아요. 이젠 배곯을 일이 없어 술로 빈속을 채우지 않아도 되니, 그 돈을 저에게 줘도 괜찮은 거죠. 때린 손으로 돈을 건네는 거, 아빠의 지독한 사과 방식이잖아요?

아빠, 저는 이제 클 만큼 커버려서 스스로 그 돈을 버는 나이가 되었어요. 사고 싶은 물건이 생기면 딱 한 번만 사달라며 손을 모으는 대신 지갑을 들고 마트에 가고요. 찬밥에 아빠가 남긴 술안주를 반찬 삼아 먹는 대신 능숙하게 배달 앱을 켜요. 아, 이젠 저도 가끔 술을 먹는답니다. 그러다 취기가 오르면 이런 글을 쓰며 속으로 되뇌죠.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시는 돈으로 건네는 당신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겠다고.

그러니 이제 더는 모른 척하지 말자고요. 나는, 지금도, 앞으로도, 아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뛰어오르는 여자아이들
©영화 벌새 

 

글. 로움(goham.roum@gmail.com)

특성이미지. ⓒ고함20 

기획[집 나가는 여자들]

기획. 이끼, 로움, 두두, 기동

1 Comment
  1. 익명

    2021년 8월 7일 23:43

    내얘기인거같아서 숨이 턱막혔어요. 아빠와의 갈등으로 집을 나가고싶은데 못나가는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이요.
    집을 나가면 궁핍해진다는 걸 알기에 더 주저하는데. 행복한가요? 나는 폭력도 아니고 그저 언어폭력정도인데도 못버티는게 잘못이 아닌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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