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기사에는 영화 〈블랙 위도우〉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치졸한 어른들의 손에 끌려 억지로 싸우는 법을 배웠던 소녀는 히어로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과 수많은 여성을 얽맨 어두운 세계를 박살 내려 돌아왔다. 흑인들의 상징이 된 ‘블랙 팬서’처럼 블랙 위도우는 투쟁하는 여성들의 얼굴을 닮았다. 

그러나 마블 팬들은 마냥 웃으며 영화관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미 〈엔드 게임〉에서 블랙 위도우는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캐릭터가 죽고 나서야 그의 성장 과정을 단독 영화로 만날 수 있다니? 경악을 금치 못한 마블 진성 덕후 이끼와 구아바가 만나 수다를 떨어봤다. 

 

이 사진은 영화 〈블랙 위도우〉의 포스터 사진이다.
영화 ‘블랙 위도우’ 스틸컷 / ⓒ월트디즈니코리아

 

우리들의 납작해진 영웅 

구아바: 블랙 위도우가 〈아이언 맨2〉에서 등장한 지  11년 만에 드디어 첫 단독 영화야! 이번 영화에서는 블랙 위도우의 여러 가지 면을 볼 수 있어서 좋았어. 지금까지는 왜 그런 면들을 볼 수 없었을까?

이끼: 그러니까! 어벤져스의 남자 히어로들은 다들 한 성깔 하잖아. 서로 대립하는 남자 히어로들 속에서 블랙 위도우는 늘 중재하는 역할인 게 싫었어. 한 유튜브 영상에 블랙 위도우를 ‘어벤져스의 어머니’라고 칭한 댓글이 달렸는데 좋아요가 엄청 많았어. 여성 캐릭터는 제 멋대로인 남성 캐릭터를 끌어안아야 하지? 

구아바: 그놈의 어머니… 전작 〈시빌 워〉에서는 또 정반대의 이야기가 나왔었어. 〈시빌 워〉 당시에 블랙 위도우는 팀 아이언맨에 속해 있었지만, 캡틴아메리카 진영과도 완전히 등을 돌리지 않았었지. 그래서 ‘박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잖아. 여성 캐릭터는 중립적인 모습을 보여도 어떻게든 비난을 받는다니. 

블랙 위도우의 행보에 이렇게 비난이 많았던 건 아마 단독 영화 전까지 블랙위도우내면서사에 집중한 이야기 자체가 없었다는 점도 큰 것 같아. 다른 남성 캐릭터들의 시련과 성장은 단독 영화로 계속 보여주는데, 블랙 위도우는 단체 영화에서 잠깐 나오다 마니까. 

이끼: 촬영은 했지만, 영화에선 누락된 미공개 컷을 보니까 블랙 위도우의 감정씬이 많더라. 관객 입장에서는 그의 감정선을 모르니까, 의견도 욕망도 없는 평면적인 인물처럼 느껴질 법해. 

 

 

고하미가 고르는 ‘최애’ 장면

 

# 인간적인 여성의 얼굴

 

이 사진은 스위스에서 선박을 타고 있는 블랙 위도우의 모습이 담겨있다.
영화 ‘블랙 위도우’ 스틸컷 / ⓒ월트디즈니코리아

 

이끼: 나타샤(블랙 위도우)가 잘 안 웃고 짜증을 많이 내잖아? 건조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여성이 반가웠어. 

구아바: 나타샤가 가짜 여권을 배 위에서 툭 떨어뜨리는 장면은 전투 장면이 아니더라도 나타샤의 스파이로서의 삶이 묻어나는 장면 같아서 좋았어. 그리고 나타샤가 벙커 안에서 스파이 영화를 보면서 대사를 따라 하는 장면도 인상 깊었어. 인간이라면 취미가 없을 수 없잖아. 그때 처음으로 이 캐릭터의 인간적인 면모를 본 것 같은 느낌이었어.  

 

# “내가 너를 구했어, 안심해”

이끼: 제일 좋았던 건 나타샤와 옐레나를 쫓던 위도우(레드룸 출신의 여성 스파이)를 역으로 나타샤가 도와준 장면이야. 나를 죽이려는 사람에게조차 ‘내가 너를 살렸으니, 안심하라’고 하는 블랙 위도우의 말이 히어로 그 자체였어.

구아바: 맞아. 빌런인 태스크 마스터와 싸울 때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멈추게 하기 위해 싸우잖아. 외부의 폭력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를 줬지만 블랙위도우 내면에 있는 선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어. 그가 여성 개개인을 사랑하는 히어로이자, 선한 삶을 추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어.

이끼: 블랙 위도우는 과거에 드레이코프(레드룸 관리자)를 죽이려다 의도치 않게 그의 딸(태스크 마스터)까지 해쳤다는 사실에 영화 시리즈 내내 죄책감을 느끼잖아. 그런데 그 죄책감을 외면하지 않고 그의 딸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이 멋있어. 〈엔드 게임〉의 남성 캐릭터인 호크 아이가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애꿎은 자경단 활동을 하는 것과 확연히 다르지. 

구아바: 사실 나타샤가 누군가를 해치게 된 이유는 남성 사회의 억압 때문이잖아. 스파이로 자랐던 이유는 레드룸의 납치 때문이고. 태스크 마스터를 해치게 된 것도 히어로 단체라는 ‘쉴드’가 나타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살인 임무를 부여해 그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니까.

이걸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나는 영화가 ‘여성이 저지르는 폭력의 맥락을 우리가 살펴봐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어. 

이끼: “여자를 미워하긴 쉽다”는 말처럼 남성 빌런이 만든 구조 속에서 여성들이 서로에게 악인이 되는 과정이 안타까웠어. 

 

# 골라보는 43가지 여성 액션

 

이 사진은 빌런 태스크 마스터와 싸우고 있는 블랙 위도우의 모습이 담겨있다.
영화 ‘블랙 위도우’ 스틸컷 / ⓒ월트디즈니코리아

 

이끼: 전투씬 이야기를 해볼까? 나타냐는 얄팍한 체형이고 옐레나는 나타샤보다 훨씬 체구가 커서 똑같은 액션씬이라도 둘의 동작 강도가 다른 게 좋았어. 

구아바: 남자 감독이 찍으면 여성이 맞는 전투씬을 포르노처럼 연출하는 경우가 많잖아. 배를 맞아서 괴로워하는 여성을 카메라가 불쾌한 시선으로 비춘다든지. 블랙위도우의 액션씬은 그런 부분이 없어서 좋았어. 

이끼: 여러 위도우들이 나타샤와 싸우는 장면도 예외 없잖아? 40명의 위도우와 3명의 주연 여성 캐릭터들에게 각각 고유한 액션 스킬이 부여되어서 다양한 여성 액션씬을 볼 수 있었어. 피도 눈물도 없는 강인한 여성들의 싸움을 사랑해.

 

 

최종 빌런은 마블이다

구아바: 블랙 위도우 역의 스칼렛 요한슨이 7월 29일 디즈니를 고소했지. 원래 극장에서만 개봉할 예정이었는데, 디즈니 측이 상의 없이 〈블랙 위도우〉를 자사 OTT 플랫폼인 ‘디즈니 플러스’에 공개했어. 이로 인해 실 관람객에 따라 수입을 얻는 ‘러닝 개런티’에 타격을 받았다는 게 이유야. 이제 정말 다시는 속편을 볼 수 없게 됐어… 

이끼: 어떻게 그런 대우를 받을 수 있지? 다른 배우도 아니고 무려 ‘스칼렛 요한슨’인데! 스칼렛 요한슨의 고소에 대한 디즈니 내부 반응도 어이없어. ‘우리를 배신했다’는 말이 디즈니 입에서 나올 말인가?

구아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아이언맨 역)는 마블 내에서 강력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돌았잖아. 마블에서 일한 연차나 비중으로 따지면 스칼렛 요한슨도 절대 적지 않은데, 내부에서 취급이 이렇게 다르다니.

스칼렛 요한슨에 이어서 〈크루엘라〉를 찍었던 엠마 스톤, 〈정글 크루즈〉의 주인공을 맡은 에밀리 블런트도 소송을 고려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이끼: 디즈니에 관한 소송들이 대부분 여성 배우들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잖아. 생각해 보면 마블 영화를 여성 배우들만 찍은 것도 아닌데 어이없지. 이 영화가  남성 중심적인 할리우드를 바꿀 계기가 될 줄 알았는데 똑같이 차별적인 구조 속에서 만들어졌다니..

구아바: 우리가 저번 주에 회의를 잡을 때만 해도 이 이야기를 하게 될 줄 몰랐어. 이젠 그냥 스칼렛 요한슨이 못 받은 돈을 받기만을 바라. 영화 속 여성 연대라는 메시지로 여성들의 심금을 울리고, 티켓 파워도 얻었으면서 수익은 여성들에게 배분하지 않는다니. 뒷맛이 너무 씁쓸해.

 

# 마블에게 한마디

이끼: 위도우마다 각자 고유한 액션 스킬이 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었어. 위도우들이 드레이코프에게서 해방된 이후 레드룸의 이야기가 궁금해. 레드룸에 대한 드라마를 만들어달라, 마블! 

구아바: 이번 영화에서 나타샤의 동생으로 등장한 ‘옐레나’가 블랙 위도우의 자리를 이을 예정이라고 해. 나타샤를 다시 볼 수 없다니 너무 슬프지만, 여성 해방의 선두에 섰던 옐레나가 앞으로 이끌어갈 마블 영화들이 무척 기대돼. 

그렇지만 마블, 일단 여성 배우들 돈 갚고 다시 얘기해보자고!

 

 

글. 구아바(guava.shim@gmail.com), 이끼(mossflower0@gmail.com)

특성이미지. ⓒ월트디즈니코리아